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문단 편집) ==== 오오히메 사건 ==== [[파일:오오히메.jpg|width=85%]] 오오히메(大姫) 1178~1197 요리토모의 큰 딸 오오히메(大姫)는 비극적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요리토모와 대립하고 있었던 호쿠리쿠의 맹장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는 자신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시타카(源義高)를 인질로 가마쿠라에 보냈는데, 오오히메와 혼인을 시켜 서로 화평을 하자는 의도였다. 당시 오오히메는 6살, 요시타카는 11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오오히메는 [[정략결혼]] 상대에 불과한 요시타카를 깊이 연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촌 지간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결국 카와치 겐지의 내전이 벌어졌다. [[1184년]] [[1월]] 요시나카는 [[역적]]으로 선언되었고, 요리토모가 보낸 요시츠네의 [[군대]]에게 우지가와 전투에서 패배한 후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요리토모의 입장에서는 요시타카가 원수의 아들로 변한 것이어서, 장래의 화근을 뿌리뽑자는 생각에 [[4월 21일]] 요시타카의 살해를 결정했다. 시녀들을 통해 이 일을 알게 된 오오히메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교묘한 계략을 꾸몄다. 우선 요시타카를 [[시녀]]로 변장시킨 뒤 시녀들로 둘러싸 저택을 빠져나가게 한 후, 미리 다른 곳에 준비해 둔 말에 태우고 말발굽에는 솜을 완충재로 감아 소리가 나지 않도록하여 도망치게 한 것이었다. 그런 후 요시타카와 늘 놀던 시종으로 하여금 요시타카 흉내를 내게 해 하루 동안 도주한 것을 은폐시켰다.[* 시종인 '''운노 코타로 유키우지'''는 훗날의 스와씨 일족이었는데, 요시타카와 덩치도 비슷한 데다가 평소에 늘 같이 놀았기 때문에 요시타카로 변장해 침소에 누웠고, 낮이 되면 혼자서 [[주사위]]로 하는, 일종의 [[보드게임]]인 '스고로쿠'를 하는 시늉을 했다. 둘이 늘 같이 하던 놀이라서 등을 돌린채 혼자 스고로쿠를 하는 시늉을 하고 있어도 방 밖 멀리서 본 경비병들은 '둘이 또 놀이를 하고 있구나'하고 무심히 지나쳐 갔고, 그 덕에 밤이 될 때까지 요시타카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 요리토모가 격노해서 추격자를 보내 즉시 [[처형]]하라는 [[명령]]을 하자 그걸 본 오오히메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혼이 날아가버렸다.'고 한다.[* 《아즈마카가미》의 표현이다. 오오히메는 당시 만 7살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남자애를 죽이라고 소리를 치는 걸 눈앞에서 목격한 것인데 기겁해 파랗게 질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 오히려 그 나이로 저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기소 요시나카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타카는 무사시국에서 끝내 추격대의 무사인 토나이 미츠즈미에게 따라잡혀 살해당했고, 요리토모는 어떻게든 이걸 숨기려고 했지만 [[4월 26일]] 요시타카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요리토모에게 들어왔다. 요리토모는 이를 비밀로 하려고 했으나 또다시 시녀들을 통해 소식이 오오히메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7살이었던 오오히메는 비탄에 빠져 물조차도 거의 마시지 않아 죽을 지경이 되었을뿐더러 저택 안도, 오오히메의 어머니인 호조 마사코도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 여기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개인의 의견을 거의 쓰지 않는 문체인 《아즈마카가미》의 저자가 지극히 이례적으로 '''막부의 창건자인''' 요리토모를 몹시 힐난하는 어조로 자기 의견을 한 마디 쓰고 있다. (오오히메가 사랑하는 요시타카를 죽였으니 저런 지경이 되는 것도)'''"지극히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런데 딸이 몇 달이나 병석에서 일어나질 못하자 호조 마사코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요시타카를 죽인 무사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려서, 아무리 명령이라고 해도 오오히메와 상의하지 않고 뒤로 몰래 요시타카를 살해한 죄는 죽어 마땅하다며 요리토모를 몹시 갈궜고, 마침 스스로도 당황해하던 차에 그 무사를 죽이면 오오히메가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요리토모는 황급히 애꿎은 토나이 미츠즈미를 참수했지만 이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10여년 동안 오오히메는 병상에 누워 [[폐인]]처럼 지냈다고 한다. 남편인 요시타카를 공양하는 보탑을 세우고 [[명복]]을 비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지만 오오히메의 마음의 병은 끝내 낫지 않았다. 18살 때는 황실과의 혼담 이야기가 오고 가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쿠조|구조]]씨[* [[후지와라]]씨의 분파로 [[고셋케]](오섭가)의 일원이었다.]가 이미 선수를 친 데다가 오오히메 본인도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연못]]에 [[몸]]을 던지겠다." 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며 끝내는 회복하지 못하고 20살에 [[요절]]했다. 어린 나이에 대단히 열렬한 [[사랑]]을 한 셈으로, 승자도 패자도 모두 무상(諸行無常)하다는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주제를 상기하면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